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니자키 준이치로 (문단 편집) == 그 외 == 아직 만 7세였던 1894년 2월 11일, 노즈 시즈다케(野津鎮武)라는 군인에게 납치당해 [[성추행]]을 당할 뻔한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, 이때의 일이 그가 만년에 쓴『유소시대(幼少時代)』(1955)에 기록되어 있다. 당시 사회에는 아직까지 전근대적인 풍습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, 어린 소년에 대한 성애(性愛)또한 마찬가지였다.[* 노즈는 [[청일전쟁]] 참전 이후 1896년 한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으로 부임하였으며, 제 1차 한일협약(1904) 체결 이후 한국의 군부 고문으로 초빙되기도 했다(당시 계급은 중좌(中佐 = 중령)). 무엇보다도 1907년 [[대한제국 군대해산]]에도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등 한국과 악연이 많은 인물이다.] 다니자키는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, 탐정소설에 관심을 가져 여러 단편들을 쓰기도 했으며, 이 작품들은 일본 추리문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[[에도가와 란포]]에게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. 이 소설들은 『범죄소설집(犯罪小説集)』으로 출간되기도 했으며,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. 영화에 관심을 보여 영화사에 소속되어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의 각본을 스스로 담당하기도 했다. 그가 각본을 담당한 첫 영화인 'アマチュア倶楽部(아마추어 클럽)'에서 다니자키는 자신의 가족들을 대거 출연시켰는데, 자신의 처제이자 내연 관계에 있던 세이코가 처음으로 발탁되어 주연을 맡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. 이 외에도 다니자키의 아내 지요, 딸 아유코가 엑스트라를 맡기도 했다. 일본 문단에서는 역시 탐미주의적 소설가로 유명한 [[미시마 유키오]]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가장 잘 이해한 작가라고 평가하였다. 미시마 유키오는 다니자키의 문학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, 태평양 전쟁에 진 직후의 풍경을 두고 미시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. > 일본 남자가 백인 남자에게 졌다고 인식해 맥이 풀려 있을 때, 이 사람(다니자키 준이치로)은 혼자서 '''일본 남자가 거대한 유방과 거대한 엉덩이를 가진 백인 여자에게 졌다'''고 즐거워하는 관능적 구도로 패전을 바라보았다. 또한 미시마는 1958년 다니자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. 그의 이름을 딴 다니자키상이 제정되어, 뛰어난 작품을 남긴 작가들에게 수여되고 있다. 다니자키상을 받은 작가들 가운데 가장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 중 하나로 [[무라카미 하루키]]가 있다. [[역사비화 히스토리아]]에서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이야기가 실렸는데 다니자키 역을 맡은 배우의 변태스러움과 문호로써의 진지함을 넘나드는 연기가 은근히 절륜하다. 다만 사토 하루오와 있었던 아내 양도 사건은 아예 빠지고 언급도 되지 않아서 왜곡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